일본이 연안을 측량한다는 구실로 조선을 침략한 운요호 사건입니다. 일본의 계획적으로 저지른 사건이죠, 조선의 해안에 나타나서 시비를 건 뒤 조선이 공격에 나서면 이것을 트집을 잡아서 일본이 유리한 통상 조약을 맺을 속셈인 사건입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들을 한번 아래에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운양호 사건
운양호사건, 운요호사건이라고도 불립니다. 1873년 12월 부터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이 조선 침략의 기회를 였보았고 1875년 운요호와 제이정묘호를 부산에 입항시키고 서해안을 따라 올라온 뒤 강화도를 침범 하였고, 강화도 조선의 해안에 나타나서 시비를 하고 조선의 항의를 무시를 하고 무력적 포함시위를 단행을 했습니다. 운요호에서 내린 일본군이 다시 작은 배를 타고 9월 20일에 강화도 초지진에 친입을 했습니다.
그래서 강화해협을 방어하던 조선수비병은 일본군을 향해서 포격을 가했습니다.
초지진과 영종진에 포격을 가했고, 상륙작전을 벌였는데, 조선은 일본군에 패했습니다. 일본군은 영존진에서 방화, 살육, 약탈을 자행을 한 뒤 퇴각을 했습니다.
침략한 이유
메이지 유신을 근대화를 추진을 하던 일본은 서양 열강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이 해외로 세력을 넓히기 위해서 가장 먼저 노린 곳이 조선이었습니다. 일본은 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이 아니라, 서구 열강의 관심이 적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조선 정부에 새롭고 근대적인 외교 관계를 맺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메이지 유신 알아보기
▼▼▼▼▼▼
메이지유신 근대화 추진 어떻게?
메이지 유신의 과정은 크게 도쿠가와 바쿠후의 붕괴와 중심 통일국가의 형성과 신정책의 실시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서 메이지유신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arthtime.tistory.com
그러나 조선 정부는 이미 전통적인 외교 질서가 있으니까 새로운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거절을 했습니다. 그 시대에 권력을 잡고 있던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자 일본은 힘으로라도 조선을 침략을 위해 운요호인 운양호를 조선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경과
이렇게 침략한 일본은 사람들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책임이 조선에 있다고 주장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 조선에 개항을 요구를 했습니다. 이건 미국이 일본과 통상 조약을 맺을 때 사용을 했던 방법을 그대로 조선에게 써먹은 강압적 위협에의하여 맺어진 불평등조약인 조일수호조약을 맺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후 조선은 일본의 압박과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는 조선 내의 일부 여론에 따라 강화도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 대륙침략의 단초였으며 신호탄이라고 합니다.
이번시간에는 운양(운요)호 사건을 알아보았습니다.
댓글